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메로베우스 왕조 (문단 편집) ==== 무력한 왕들 ==== 시게베르 3세는 침네차일드와 결혼했으나 아들을 좀처럼 얻지 못했다. 이에 그리모알트는 자기 아들을 양자로 삼을 것을 권고했고, 그는 이를 받아들이고 아이에게 '킬데베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런데 얼마 후 침네차일드 왕비가 [[다고베르 2세|다고베르 왕자]]를 낳았다. 이로 인해 킬데베르가 왕이 될 가망이 사라지는 듯했지만, 그리모알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656년 시게베르 3세가 사망하자, 그리모알트는 사병들을 이끌고 궁궐을 장악한 뒤 어린 다고베르를 삭발하고 푸아티에의 주교 디도에게 보내 [[수도자]]로 삼게 했다. 디도는 이 소년을 아일랜드의 [[수도원]]들 중 한 곳으로 데려갔고, 그리모알트의 친자이자 시게베르 3세의 양자인 킬데베르가 '''[[킬데베르 3세]]'''로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메로베우스 왕가의 피를 물려받지 않은 자가 왕위에 오른 것에 반발한 이들이 많았다. 특히 클로비스 2세 사후 '''[[클로타르 3세]]'''를 왕으로 옹립한 뒤 정권을 휘두르고 있던 궁재 에브로인이 이 기회를 틈타 아우스트라시아를 공략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그리모알드와 킬데베르 3세를 네우스트리아로 유인해 처형했다. 이후 수 개월간 차기 아우스트라시아 왕이 될 적임자를 물색한 끝에 시게베르 3세의 조카인 '''[[킬데리크 2세]]'''를 [[시게베르 3세]]의 딸 빌리킬다와 결혼시키고 아우스트라시아의 왕위에 오르게 했다. 에브로인은 614년 [[클로타르 2세]]가 반포했던 칙령을 폐지해 귀족들이 직위를 세습하는 걸 막았고, 중앙 정부에서 파견한 관료의 지시에 무조건 순종하라고 지시했다. 이 정책에 반감을 품은 네우스트리아 귀족들은 에브로인을 축출할 임모를 꾸몄고, 파리의 새 주교 시게브란트도 여기에 가담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곧 발각되었고, 주교는 처형되었다. 에브로인은 말을 듣지 않는 귀족들을 가차없이 숙청하는 한편, 귀족들이 왕궁에 접근하는 것마저 차단했다. 그러나 오툰의 레오데가리우스 주교가 이끄는 부르군트는 그의 통제에 따르지 않고 관례대로 자치를 누렸다. 665년, 클로타르 3세의 어머니 바틸다가 에브로인의 강요에 의해 셀라에 있는 수녀원으로 들어갔다. 에브로인은 이후에도 권세를 누렸고, 클로타르 3세는 별다른 정치 참여를 하지 않은 채 조용히 지내다 열병에 걸려 재위 16년째인 673년 3월 10일에서 5월 15일 사이에 사망했다. 이에 에브로인은 귀족들과 논의하지 않고 클로비스 2세의 셋째 아들 '''[[테우데리크 3세]]'''를 새 군주로 내세웠다. 부르군트의 레오데가리우스 주교와 형제인 파리 백작 바렌 등 주교들은 에브로인의 독단적인 처사에 반감을 품고 킬데리크 2세와 궁재 울포알드에게 에브로인을 몰아내준다면 프랑크 전체의 왕으로 추대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킬데리크 2세는 파리로 진군해 귀족들의 호응을 얻었고, 테우데리크 3세와 에브로인은 삭발하여 [[수도자]]가 되었다. 테우데리크 3세는 생드니 [[수도원]]으로 보내졌고, 에브로인은 부르군트의 룩셀 수도원으로 보내졌다. 레오데가리우스 등 귀족들은 킬데리크 2세에게 프랑크 전체의 왕으로 옹립하는 대가로 3가지 법령에 서명하도록 했다. 첫째 법령는 각 지역마다 고유한 법과 관습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고, 두 번째 법령은 고위 관리인 공작과 백작은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전출되지 않는다는 것이며, 세 번째 법령은 궁재 직을 폐지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 3가지 법령 모두 받아들였다. 다만 아우스트라시아 궁재는 직위를 유지했다. 그러나 674년 성년이 된 그는 나라를 스스로 통치하려 했다. 레오데가리우스가 이를 막으려 들자 주교 직을 박탈하고 룩셀 수도원에 수감했다. 또한 지금까지 아우수트라시아 왕국만 관장하던 울포알드가 왕국 전체를 관장하게 했다 한편, 툴루즈 공작 루푸스 공작은 673년에서 676년 사이에 프랑크 왕국이 권력 분쟁으로 혼란스러운 틈을 타 로데즈와 알비를 점령했으며, 전통적으로 네우스트리아 왕국의 소유지인 리모주를 점령했다. 그리하여 루푸스는 비엔 강에서 가론 강까지 이르는 광대한 아키텐 공국을 부활시켰다. 그러나 킬데리크 2세는 툴루즈 공작의 영역 확장에 신경쓰지 않고 귀족들을 숙청했다. <프랑크 왕국 역사집>에 따르면, 그는 보딜로를 잡아다가 막대로 채찍질 했다고 한다. 675년, 보딜로와 친구 아말베르트, 잉고베르트는 리브리(오늘날 로그네스) 숲에서 사냥하던 왕을 암살하기로 했다. 왕은 숲에서 사냥하던 중 아내 빌리칠트, 다섯살 된 장남 다고베르와 함께 살해되었다. 사후 네우스트리아 왕위에는 지난날 폐위되었던 [[테우데리크 3세]]가 복위했다. 한편, 에브로인은 수도원에서 나온 뒤 아우스트라시아로 이동한 후 한 소년을 [[클로타르 3세]]의 [[사생아]]로 내세우며 '''[[클로비스 3세]]'''로서 왕위에 올렸다. 이후 에브로인이 군대를 이끌고 오자, 테우데리크 3세는 레오데가리우스와 함께 도주했다. 에브로인은 권력을 장악하고 레오데가리우스를 암살했다. 그러나 귀족들이 클로비스 3세의 혈통을 의심해 왕으로 옹립하기를 거부하자, 에브로인은 클로비스 3세를 폐위하여 수도원에 보낸 뒤 테우데리크 3세를 복위했다. 아무런 실권이 없던 테우데리크 3세는 에브로인이 궁재로서 통치를 행사하는 걸 방관했다. 677년, 에브로인은 테우데리크 3세를 대동하여 아우스트라시아 원정에 착수했다. 아우스트라시아 궁재 울포알드는 이에 맞서 [[다고베르 2세]]와 함께 출진했다. 양군은 랑그르에서 맞붙었지만 승패를 가리지 못했다. 678년, 에브로인은 왕을 부추겨 주교 평의회를 소집한 뒤 오툉의 레제 주교를 킬데리크 2세 암살 혐의로 재판에 회부했다. 이에 대한 증거는 없었지만, 에브로인의 권세를 두려워한 주교들은 유죄를 평결했고 왕 역시 사형을 선고했다. 679년, 울포알드와 다고베르 2세가 잇따라 살해되었다. 에브로인은 아우스트라시아를 병합하기로 마음먹고, 자신의 손아귀에 있는 테우데리크 3세를 프랑크 전역의 단독 군주로 선포했다. 이에 아우스트라시아의 유력 귀족인 [[피핀 2세]]와 상파뉴 공작 마르틴이 반기를 들었다. 680년, 에브로인은 루코파오 전투에서 두 귀족을 격파한 뒤 아우스트라시아 대부분을 초토화했다. 피핀 2세는 자신의 땅으로 피신할 수 있었지만, 마르틴은 랑트로 피신했다가 귀순하면 살려주겠다는 에브로인의 말을 믿고 병사들과 함께 항복했다가 피살당했다. 이제 에브로인을 막을 자는 아무도 없는 듯했지만, 얼마 후 그의 잔혹한 성정에 반감을 품은 에르멘프레드에게 궁정에서 살해당했다. 에르멘프레드는 보물들을 챙기고 피핀 2세에게 달려가 귀순했다. 피핀은 새로운 네우스트리아 공작 와라톤과 평화 협약을 맺고 테우데리크 3세의 권위를 인정하되 자신 역시 아우스트라시아 궁재로 인정받았다. 686년 와라톤이 아들 지젤마르에게 폐위된 후, 처남 베르차르가 뒤를 이었다. 와라톤의 아들 지젤마르와 베르차르는 경쟁자들을 최대한 배제해 권력을 유지하길 희망했고, 이로 인해 많은 네우스트리아 귀족들이 갖은 탄압에 시달리다가 피핀 2세에게 귀순했다. 687년 군대를 일으킨 피핀 2세는 [[뫼즈 강]]을 따라 이동했다. 프랑크 국왕 테우데리크 3세는 피핀 2세의 강대한 권력을 경계하여 베르차르의 편을 들었고, 베르차르는 군대를 일으켜 피핀과 맞설 태세를 갖췄다. 피핀 2세는 평화 협약을 제안했지만, 테우데리크 3세는 베르차르의 조언에 따라 거절했다. 이에 피핀은 새벽에 군대를 뫼즈 강 건너편에 은밀히 이동했다. 날이 밝아오면서, 베르차르는 적 군영이 텅 비었다는 걸 확인했다. 그는 즉각 군대를 이끌고 군영으로 들어가서 버려진 물자를 약탈했다. 이때 사전에 매복하고 있던 피핀 2세의 군대가 덮쳤고, 베르차르의 군대는 별다른 대항도 못하고 궤멸되었다. 테우데리크 3세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지만, 베르차르는 적군에게 쫓기다 끝내 피살되었다.([[테르트리 전투]]) 이후 피핀은 수도 파리로 진격하여 단숨에 공략하고 테우데리크 3세를 붙잡았다. 하지만 국왕을 폐위하지는 않고, 네우스트리아-부르군트 분국의 궁재까지 맡으면서 프랑크 왕국 전역의 궁재가 되었다. 피핀 2세는 680년대 중반부터 프랑크 왕국의 북동쪽 국경을 위협하던 [[프리지아]] 부족들을 공략, 원정하여 689년에 물리치고, 조공관계를 형성하였다. 또한 [[알레만니]]족과 [[프랑코니아]]를 프랑크 왕국에 복속시켰고, 영향력을 공고히했다. 알레만니아와 바이에른에 기독교 선교사 파견과 수행을 도와 기독교 선교를 지원, 장려했다. 691년 테우데리크 3세가 사망한 뒤 '''[[클로비스 4세]]'''가 즉위해 4년간 왕좌에 앉았지만 별다른 실권을 행사하지 못한 채 695년 사망했고, 뒤이어 동생 '''[[킬데베르 4세]]'''가 왕위에 올라 16년간 통치했지만 역시 별다른 실권을 행사하지 못하다가 711년 사망했다. 이후 킬데베르 4세의 아들 '''[[다고베르 3세]]'''가 왕위에 올랐지만 역시나 허수아비 국왕일 뿐이었다. 피핀 2세는 아우스트라시아에서 통치를 행사하는 한편 네우스트리아와 부르군트를 아들 그리모알드에게 맡겼다. 그러던 714년, 그리모알드가 모종의 이유로 급사했고 피핀 2세도 곧 사망했다. 이후 그리모알드의 아들 테오도랄드가 궁재를 세습했지만, 아직 나이가 어렸기에 피핀 2세의 미망인인 플레트루다가 섭정을 맡았다. [[카롤루스 가문]]의 권력 독점과 세습에 반감을 품고 있던 네우스트리아 귀족들은 이 때를 틈타 반기를 들었다. 그들은 715년 상파뉴 인근의 숲에서 아우스트라시아군을 격파하고 카롤루스 가문의 지배로부터 독립한 뒤 라간프레드를 궁재로 선출했다. 프랑크 왕국이 이 일련의 상황으로 혼란스러울 때, 715년 오세르의 주교 사바리크가 오를레앙, 네베르, 아발론, 톤네레를 정복하고 남부 프랑스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